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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인, 당신은 자신을 어떻게 표현하며, 이젠 어떠신가요?


뭐든 그런 법이죠. 판단 자체는 늘 어렵지만 그 중에서도 ‘자신에 대해 평가’하는 건 더 어렵다는 거. 나 자신만큼 객관성이 떨어지는 채점자가 어디 있겠어요. 뭐… 다른 사람들은 저를 회의적이라거나, 철학적이라거나. 대충 그런 식으로 말해주던데… 글쎄, 이건 사람을 너무 좋게 보는 거라니까요. 그래요… 굳이 저 자신을 평가하자면 나태하다거나, 솔직하다거나. 그 편이 맞지 않을까요. 소용 없다는 건 알지만 나태하니까 다른 의견을 낼 생각도 않고, 그러면서도 제가 맘에 안 드는 건 그대로 말해버리고… 아, 싫다 싫다. 저 같아도 저 같은 애랑은 굳이 엮이고 싶지 않겠네요. 이런 걸 적는 동안에도 벌써 몇 번이나 지웠다 썼다 반복하는 것 같은데… 이런 걸 굳이 해야 하나요. 정말… 

 

네? 이걸로는 짧다고요?

하아… 그러면, 그래요. 전 거짓말이 싫어요. 쓸데 없이 머리를 굴려야 하고, 남한테 피해나 주고… 좋을 거 하나 없죠. 남을 위해 하는 거짓말? 그게 다 뭐람. 결국 다른 사람의 생각은 무시하고 제 멋대로 ‘이렇게 해야 저 애한테 더 좋을거야’ 하고 생각하는 거잖아요. 오만하지, 아무래도.

 

네, 맞아요. 맞습니다. 오지랖 넓은 거… 인정합니다. 어쩌겠어요.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다 아는 사람들인데 그걸 무시할 수도 없고. 내가 아무리 다른 사람들의 행동이 비합리적이라 느끼고 마음에 안 든다고 말하면 뭐해요. 결국 그것도 그 사람들의 판단인데. ...무슨 말을 얹으려면 도와주기라도 해야지. 결국 제 행동도 자기만족에 자기합리화에요.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어요. 저는 여기서 살아남기 위해, 최대한 살리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하고… 제가 할 수 있는 건 이성적인 판단이니까요. 벌써 몇 명이나 사라졌고, 다시 만날 수 없는… 아니, 다시 만나서는 안 되는 상황이 되어버린 거예요.

슬픔이나 충동은 이미 다른 사람들이 충분히 품고 있으니만큼, 저는 어떻게든 더한 희생자가 나오지 않도록 노력하고 싶어요. 그래서 지금 이렇게 슬픔, 두려움, 뭐어… 대부분의 감정을 죽여둔 채로 있는 거고.

 

그리고, 저랑 대화하는 건 재미없을 거라는 걸 자각하고는 있지만… 어떻게든 계속 모두와 대화를 하려고 하고 있어요. 소중한 기억보다는 가벼운 기억이 먼저 지워지니까, 계속해서 다양한 대화를 하는 걸로 기억들을 쌓아두고 싶거든요. 지금 와서는 그 모든 대화들이 소중하게 느껴져서 더 곤란해졌지만. …그런 대화들까지 소중해져버렸으니까, 이제 기억을 잃어도 괜찮다고 할 수 있는 가벼운 기억은 만들 수 있기나 할런지.

[ 체스 ] 동아리 활동은 어떠셨는지요.

여전히 기억하고 계신가요?

그렇죠 뭐. 맘 편했으니까. 체스를 할 때는… 상대의 전략만 읽으면 되는 거잖아요. 말 하나하나에 과몰입해서 감정적인 수를 두는 사람은 없으니까. 예를 들어 이 비숍 하나가 상대의 폰을 잡았다고 해서, 킹이 그걸 직접 복수하러 오는 일은 없죠. 그런 거에요. 정확히 이성적으로 행동하기만 하면 뭐든 괜찮은 게임. 현실이랑은 다르죠. 사람이든 동물이든, 폰처럼 단순한 졸병으로 칠 수 있는게 아니니까. 우리 입장에선 엑스트라처럼 보여도 그들은 모두 자신만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고, 그들의 이야기에서 주인공을 맡고 있잖아요. 

여러모로… 현실보다는 체스 쪽이 맘 편해요. ...또 얘기가 샜나? 어쨌든, 재밌다구요. 체스.

 

미안해요. 이제… 기억도 안 나네.

귀인, 당신을 더 알고 싶어요.
제가 더 알아도 괜찮다면 말이죠.

네, 많은 걸 바라네요. 나쁘지는 않지만요. ‘이 정도면 알아주겠지’하면서 바라는 거 하나 얘기 안 하고 눈치채주길 바라는 사람보다는 낫잖아요.

...뭘 얘기해야 하나… 그래요.

저, 프로그래밍이랑 해킹을 독학했어요. 대충 어디 보안을 뚫는다거나, AI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혼자 1인 2역으로 체스를 한다거나… 왜요. 혼자 체스할 수도 있는 거잖아요. 다른 동아리 사람들은 맨날 연습한다면서 혼자 뭘 하던데, 저라고 못할 게 어디 있어요? 

 

좋아하는 거요? ...푹 자는 걸 좋아해요. 저 불면증이 있거든요, 어차피 꿈을 꿔도 다 나쁜 결과 뿐이고. 좋은 꿈이면 현실과 비교하게 되는데, 그러면 상대적으로 비참해지니까 싫고, 나쁜 꿈은 더 댈 이유도 없이 싫어요. 싫어하는 건 그거랑 똑같은 이유로 피곤한 일이에요. 심적으로든, 신체적으로든.

[ 잡음과 끊어짐이 심한 기록입니다. ]

 

기억과 감정의 상관관계. 이전에 몇 번 본 적 있는 자료였던 것 같아요. 기억 자체보다 그 기억을 더 입체적으로 구성하는 건 그 당시의 감정이라고. 그래서 그런 걸까요, 지금은 옛날의 기억보다 그 옛날의 감정을 더 많이 잊어버렸어요. 그 덕에 불면증은 어느정도 가시고 있지만… 여전히 불안하긴 하네요. 옛날의 감정이 세워둔 경고등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건, 또 다시 똑같은 실수를 할 수도 있다는 뜻이니까.

 

그리고, 이건 잊어버릴까봐 기록해두는 정보.

1학년 이가율은 이곳에서 반드시 살아나가, 하고 싶은 것을 전부 할 거예요.

하나, 이곳에서 잃어버린 사람들의 AI를 만들어 영원히 잊지 않도록 하는 것.

둘, 잊어버린 만큼 다시 지식을 채워넣어야겠죠. 도서관에 1주일 정도 틀어박혀있고 싶네요.

셋, (이 이후의 기록은 끊겨있다.) 

 

마지막으로, 만약을 위해 남겨두는 자료.

제가 상상한 최악이 현실로 이루어진다면, 3학년 선배에게 맡겨둔 제 이름이 새겨진 화살과 제가 따로 빼둔 화살통을 챙겨주세요. 모든 사망자의 이름을 새겨두었거든요. 전 죽는 게 무섭지만, 잊혀지는 게 더 무서운 사람이라. … 만약 이걸 보고 있는 게 저와 함께 있던 생존자 중 누군가라면, 미안해요. 저는 죽고 싶지 않았는데.

 

그리고, 제가 상상한 차악이 현실로 이루어진다면, 죄송합니다. 이 생각은 결코 (이 이후의 기록은 끊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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