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귀인, 당신은 자신을 어떻게 표현하며, 이젠 어떠신가요?
나를 내가 설명하라고? 뭐 그런 질문이 다 있어. 천누리. 3학년. 밴드 동아리 보컬 담당. 축제 공연 봤으면 날 당연히 알텐데, 그렇지? 얼마나 고생하면서 연습한 무대인데, 당연히 기억에 남아있겠지. 말 안해도 알아~ 화원고에서 날 모르면 간첩이지. 유명인이라고? 날 동경하는 후배들의 부담스러운 눈빛을 느끼는게 어디 하루 이틀이어야 말이지.. 어, 이런 거 말하는 거 아냐? 그럼 그걸 말하라고 처음부터 똑바로 말하란 말이야! 귀찮게시리.. 다시 말해야 하잖아.
음.. 난 하고싶은 걸 하는 사람이야. 그게 노래든, 공부든, 난 쉽게 포기 안해. 그거야, 당연하잖아. 포기해버리면 재미 없으니까? 아, 하지만 내 흥미 밖의 주제에는 전혀 관심 없어. 내가 좋아하는 걸 하기도 바쁜데 다른 걸 신경 쓸 틈이 어디 있담? ‘인생은 짧고, 즐길 건 많다.’ 라는 말도 있잖아?
그리고 또 뭘 말해야 하려나.. 다른 애들은.. 나한테 잔소리 좀 그만 하라고 하는데. 아니, 이게 다 너희를 위한 조언이잖아. 응? 나 졸업하면 누가 메인 보컬 할 거야, 내가 잔소리를 하는게 아니고 다 밴드 동아리를 위해서고, 넓게 봐서는 우리 학교를 위해서잖아. 지금 너도, 지금 똑바로 안 듣고 있지?! 어? 이래서 내가 마음 편히 졸업을 할 수 있겠어? 정신 차리고 똑바로 좀 하란 말이야! (한참 동안 잔소리가 이어졌다.) 아, 글쎄! 잔소리 아니라니까!
오늘로 며칠이 지났지? 이 기록이 몇 번째인지 잘 모르겠어. 기억이 잘 안나. 이제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잊은 것들이 더 많을 것 같아.. 하지만 그동안 살아남으면서 생각을 많이 하게 되더라고? 갑작스럽게 찾아온 죽음, 제발로 걸어나간 애들, 희생을 택한 선생님, 소중한 사람을 잊지 못해 떠나지 못한 녀석까지..
사실 고민 많이 했어. 이렇게까지 내가 애들을 지킬 필요가 있을까? 다들 포기해버린다면 나한테 그게 다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냥, 나만 살아남기로 노력하면 되는 거 아닐까? 그런 이기적인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
하지만 있잖아, 난 태어나기를 남한테 신경 쓰는 사람인가봐. 누군가 다쳐오면 마음이 아파. 내가 쉬고 있을 때, 사고가 나면 그 무력감이 견딜 수가 없어. 악령에게 죽을 뻔 했을 때도 내가 죽는 것보다, 나와 같이 있던 애들이 위험하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어. ..원래 내가 어떤 사람이라고 했더라? 잘 기억이 안나. 하지만 분명 하고싶은 걸 한다고 얘기했을 것 같아. 그렇다면, 지금 내가 하고 싶은건.. 지키는 거야. 남은 애들, 남은 쌤들과 함께 여기서 빠져나갈 거야.
[ 밴드 ] 동아리 활동은 어떠셨는지요.
여전히 기억하고 계신가요?
밴드 동아리.. 멤버들이랑 의견이 마음에 안 든다고 싸울 때도 있었고, 잘 안풀리는 날도 있었지만.. 돌아보면 재밌었지. 처음에는 내 경력으로 삼으려고 들어온 거였어. 그런데 생각보다 마음에 들더라? (잠깐 웃음 소리가 들린다.)
무대에 오를 때는 역시 내가 무대 체질이구나 싶기도 하고.. 팬도 많이 생겼지. 공연 다음 날에는 사물함에 팬 레터와 선물들이~.. 아, 날 자랑하는 시간이 아니었지. 아무튼 꽤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아. 공연 영상을 본 사람들한테 연락달라고 명함도 받았지. ..아, 그런데! 다 좋은데, 잠깐만 들어봐! 딱 하나 마음에 안 드는거 있어. 내가 동아리 활동 중에 잔소리 많았다는 건 인정 못하겠어. 그게 어떻게 잔소리야! 그건 전부 우리 무대의 완성도를 위해서였다고!
밴드부.. 말이지.. 잘 모르겠어. 이제 무대에 섰던 기억도 거의 나지 않아. 저번에는 내가 보컬이었다는 것도 까먹을 정도였으니까. ..이거 기록하고 나서는 또 까먹을지도 몰라. (허탈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이러니하지,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건데.. 싫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이러면 안되는데.. (떨리는 목소리가 이어졌고, 곧 기록이 끝났다.)
귀인, 당신을 더 알고 싶어요.
제가 더 알아도 괜찮다면 말이죠.
뭘 더 알고 싶은데? 이거 사생활 침해 아니야? 학생의 인권도 존중하는 세상이 온 지가 언젠데.. (궁시렁 거리더니 쯧, 하고 혀를 차는 소리가 들린다.) ..이거 공개되는 거야? 아무나 들을 수 있는 건가? 뭐.. 그럼 내가 알아서 적당히 말할게. 내가 노래 부르는게 삶의 이유인 건 다들 알고 있을테지. 그 외에는.. ..웃지 않을 거라면 얘기할게.
(한참을 말이 없다.) ..봉제 인형 만들어. 어릴 때 부터 취미로 부모님 도와서 바느질을 좀 했거든.. 귀여운 인형 같은 걸 보면 스트레스가 풀리잖.. 아닌가? ..아 됐어, 이거 기록하지마. 괜히 말했다. (잠깐 짜증을 내는 듯한 앓는 소리가 들린다.) 소문 나면 학교 고소할 거야. 진짜야? 난 언제나 진심이라고. 나한테 인형 들고 찾아오지마. 선물로도 주지말고. 둘 곳 없어. 진짜야.
(문득 떠오른 듯, 작은 박수 소리가 한 번 들린다.) 선물하니까 떠오른 건데 나한테 조공할 거면 초코 소라빵 가져와.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거니까. 괜히 이상하고 쓸모도 없는 거 내 사물함에 걸어두고 가지 말란 말이야. 난 실용적인 사람이야. 토끼 귀 모자는 왜 준 거야. 이거 쓰고 공연하라고? 미쳤어? 아,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그리고 나 x튜브 채널도 있으니까 구독해줘. 가끔 노래 한거 올릴게. 알았지?
또 뭐가 있더라.. 내가 정말 좋아하는게 있었는데, 뭔지 기억이 안나. 빵.. 무슨 빵이었던 것 같은데. 뭐였더라? 정말 기억이 안나.. 어쩌면 좋지. 자꾸 이렇게 잊으면 안되는데.. 언젠가는 내가 모든 걸 잊을까봐 두려워. 그렇게 된다면 할 수 있는게 없잖아. 혹시 기억하고 있는 애들이 있다면 알려줘. 부탁이야, 하나라도 더 기억하게 해줘..

[ 음악메이트 ]
한별이는 다재다능한 애야. 뭐든 평균은 하는 재능이 있지. 응? 어떻게 알게 됐냐고? 언제였더라..? 1학년 초였나? 날 따뜻할 때, 같이 음악회에 가지 않겠냐고 먼저 다가오더라고. 나야 거절할 이유는 없었으니까 같이 갔지. 그 뒤로 계속 시간이 나면 같이 공연을 보러 가고 있어. 관람이 끝나면 감상평을 나누기도 하고.. 아무래도 음악은 장르가 넓으니까, 내가 좋아하는 장르가 아니더라도 배울 점도 꽤 있고. 가끔 내가 노래하는 걸 들어주기도 해. 정작 본인은 음악에 재능이 없다곤 하지만, 이론은 꽤 빠삭한 녀석이거든. 나처럼 뭐든 열심히 도전하고 최선을 다하는 애라서 마음에 들어.

[ 티격태격 밴드부 ]
아~ 우리 베이스? 2학년 멤버야. 베이스 실력도 괜찮고, 연습도 열심히 하는 애지. 조금 이것저것 귀찮아하는 경향이 있지만.. 내가 뭐라 지적하면 바로 수용하기도 하고.. 의견이 안 맞으면 투덜 거릴 때도 있지만 심성이 나쁜 애는 아니야. 몇몇 공연 때도 꽤 좋은 모습을 보였고.. 미래가 기대된다고 해야하나. 응, 좋은 녀석이지.